1시 53분, 문자메시지가 왔다

2009. 3. 5. 01:01 Essay

가끔씩 찾아오는 감상적인 밤인지라 작심하고 며칠 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지난해부터 내 주소가 일산 외삼촌댁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첨언하자면 나는 현역병 시절 수색 근처의 부대에서 복무했다. 다시, 이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며칠 전, 아침 햇살이 예사롭지 않았다. 봄의 기운을 느꼈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이를 닦다가 문득 올해 예비군 훈련 일정이 슬슬 시작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의 예비역들에게는 하루쯤 쉬다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여유로운 일정이겠지만 내게는 큰 부담이다. 복무한 곳보다 멀리서 예비군 훈련을 받는 흔치않은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만 그런 마뜩잖은 경험을 올해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애초에 일산으로 옮긴 장본인도 엄마였으므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반면 수고비가 어쩌구 구시렁거리며 요구에 당당히 응하지는 않은 엄마는 앉은 자리에서 외삼촌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이로운 추진력에 혀를 내두르며 지켜봤다. 추진력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현욱이 입학식이지."

사촌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외숙모가 입학식에 같이 가느라 집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없었을 거라고 엄마가 추측했다. 아아, 하고 수긍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에 엄마가 왜 따라가요?"

"가지 왜 안 가?"

자그마치 십삼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니 우리 둘 다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도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엄마가 너 입학식 때 교실 뒤에서 지켜봤잖아. 기억 안 나? 선생님이 임시 반장 뽑는다고 반장이나 부반장 해 본 적 있는 학생 손 들라고 할 때 너는 가만히 있더라.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너 왜 안 들었냐고 물어봤더니 반장 부반장 해 본 학생이 한두 명이었겠느냐고 그랬잖아."

나라면 그러고도 남지만, 정말로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에이, 그건 중학교 때잖아요."

일단 우겨봤다. 우기면서도 중학교 입학 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왠지 고등학교에서는 그보다 더 즉흥적으로 임시반장을 선출했던 것 같다. 출석번호 1번이라든가, 하필 담임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녀석이라든가. 혼자 생각에 도취된 내가 밀어붙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졸업식 때 말고는 오신 적 없어요."

"…아닐걸."

"맞다니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다시 서울시민이 되는 시기가 약간 늦어졌다는 거, 그게 중요할 뿐이었다. (쓰고보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무익한 논쟁은 그만두기로 하고 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그런데 사안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나는 일순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걸 느꼈다. 영 개운치 못한 기분. Ctrl+Alt+Del 키를 눌러 프로그램을 강제종료하는 기분. 아마 엄마와 오랜만에 태평스런 대화를 나눠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대화의 끈을 놓치기 싫었다.

"엄마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엄마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이 틈을 노리지 않을 리 없었다.

"왜요, 아빠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런 식의 농담이 몇 번 오갔고, 그러다가 이제야말로 출근하려고 일어나는데 그때까지도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엄마가 슬쩍 말했다.

"학생 때로 돌아가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보고 싶어."



엄마가 스물한 살일 적에 내가 태어났고 스물세 살에는 내 동생이 태어났다. 지금 나는 서른이고 동생은 스물여덟이다. 동생은 두 돌 지난 딸이 있다. 엄마가 엉겁결에 할머니가 된 지 이태가 지났다는 말이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키우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나만 생각하고 산다. 엄마에게는 엄마만을 위한 삶이 얼마나 있었을까? 혹시라도 아빠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그건 아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엄마만을 위해 사실 수 있을까? 엄마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던 그날 오후 1시 53분, 문자메시지가 왔다.

"주소 이전했다 수고비죵"

글쎄, 이제부터라도 엄마만을 위한 삶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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