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소식
2010. 5. 14. 13:40 Essay
고등학교 2학년 때 개학과 동시에 전학을 온 친구가 있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그와 짝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학교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흉내를 잘 내고 깐죽거리기를 즐겼으나, 선을 지킬 줄 알았고 늘 공손했다.
이런 기억이 있다. 독일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설명을 하시다 칠판에 교차로를 그리고는 길 이름을 뭐라고 할지 물었다. 나와 그는 2분단 맨 뒷자리에 앉았었다. 교실 전체가 보이는 자리였는데 아무도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가 번쩍 손을 들고는 "이대로!"라고 외쳤다. 그로부터 수많은 아류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저대로" 등등. 그는 어쩌면 선동가 기질이 있었던 걸까? 그래도 길 이름이 모자라자 그가 다시 나섰다. "빳데루!" (칠판에는 '빳데로'라고 쓰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그를 좋아한 건. 나는 재기발랄한 그가 좋았다. 실은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한번은 과천에 소풍을 갔다가 친구 두어 명과 함께 평촌에 있는 그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었다. 어머니는 일하러 가셨고 동생은 학교에서 막 돌아왔을 거다. 집에 오래 머물진 않았다. 앞에 나와서 농구를 했거나 농구하는 꼬마들을 지켜봤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집앞 은행에서 마신 둥굴레차의 맛이다.
2학기 때 그는 연기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우리반엔 연기학원에 다니는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좀 걱정이 됐다. 그가 충동적으로 진로를 결정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에게 내 불안을 말할 정도로 주제넘진 않았다.
3학년 때도 우리는 같은 반이었다. 문과반은 네 개뿐이라 확률이 그리 희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짝도 아니었고 집에 놀러갈 정도로 서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대개의 인간관계는 별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멀어지는 것이다.
졸업 후 대학 1학년 때 우리는 다시 만난 적이 있다. 동창회 비슷한 거였다. 늦게 도착한 그는 연기학과에 진학했다고 했다. 경기도에 살고 학교도 경기도에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서울을 종단해야 해서 힘들어 죽겠다며 웃었다. 지금은 무슨 오락실 게임기에 쓰일 음성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나는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그가 잘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제 문득 그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을까? 혹시 배우가 되진 않았을까? 검색사이트는 무수한 다른 이름과 함께 그의 근황을 내놓았다. 앞에 '배우'를 붙여 새로 검색하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소식을 보며 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지금은 뮤지컬을 하고 있고, 전에는 단역으로나마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단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저마다의 공간에 쓰고 있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십 년 전부터도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기뻤던 건, 그가 그날 이후로 한눈 팔지 않고 한결같이 연기를 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내 얘기를 잠깐 해보자면, (내가 그의 재능을 알았듯) 나는 내 재능에 대해서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세상엔 나 이상의 재능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고 있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저 내 멋에 겨워 사는 철부지로 볼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배수진을 치는 거다. 여기서 배수진은 사람 이름이 아니다. 으이구 좀!) 그러던 차에 친구의 소식은 내게 어떤 확신을 주었다. 막연한 북돋움이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이를 꾸준히 갈고닦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해 눈으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의 공연을 예매했다. 21일에 보러 갈 거다.